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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검으로 피어난 꽃 <11화>

[완결] 작품/소설

by 이웃집 낙서장 2020. 4. 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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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로부터 입수된 Alex Yomare님의 이미지입니다.

작가: 밝은솥귀


  군대가 마을로 귀환하기까지 3일이 걸렸다. 성 내의 의료소로 이송된 윤회는 일주일간 혼수상태에 젖었고, 팔이 잘린 지 열흘이 지난 후에야 겨우 의식을 찾았다. 몽롱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독한 환통을 느끼면서도 담당 여급에게 상황을 물었다. 여급은 떨리는 목소리로 윤회가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군이 깃발을 거꾸로 매단 채 귀환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윤회는 환자복 차림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하고 병실을 나서고자 문을 찾는다. 몇 명의 여급들이 그런 윤회를 만류했다.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어요. 깨어나면 영주님께서 지시를 내리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윤회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었지만 이미 의식은 조급함에 꿰인 상태였다. 여급들을 밀치려는 순간, 마침 지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호는 손을 뻗어 윤회의 어깨를 지그시 밀어냈다. 의외로 아주 온화한 얼굴빛을 띠며 윤회는 타이른다.

  "곧 네 가족들에게 알릴게. 자리에 누워 있어. 영주님의 명령이기도 하니까."

  ".. 올해 전투는..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키하다에게 패배한 걸로 끝이었어. 바로 귀환했으니까. 이익 배당까지 모두 분배됐으니 올해 전투는 완전히 종료야."

  "그래.. 내가.. 진 거군.."

  "일단은.. 쉬어 둬. 힘들겠지만."

  지호는 윤회가 침대로 돌아가기까지 기다린 후 윤회의 가족들에게 의식을 찾았음을 전했다. 윤회의 어머니, 이모. 그리고 현희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현희는 와락 오빠를 껴안았고 윤회는 가슴께에 스며드는 동생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들어 현희를 달래려 했지만 이내 오른팔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어색하게 왼손을 들어 현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참고 있는 어머니와 이모를 올려다본다. 

  "제가 졌어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해요..."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다. 고맙다. 내 아들.."

  어머니는 두 자식을 부둥켜안으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모가 연신 눈가를 훔치는 가운데 가족을 함께 슬픔을 나누어 가졌다. 후회와 걱정을 시간에게 의탁한 채 서로에 대한 염려로 심신의 아픔을 달랠 뿐.

 

  윤회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눈에 띄게 기뻐한 건 이전 서기관 부관이었다. 일대일 대결에서 활을 쏘아 윤회의 목숨을 살린 그녀는 군법에 의해, 정확히는 호란의 분노에 따른 결정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군기 위반에 하극상 죄까지 뒤집어쓴 상태로 사형을 두려워할 상황이었지만 그 눈빛은 간수가 의문을 품을 만큼 평화로웠다. 일주일째 벌레가 꼬인 빵과 쇠맛이 나는 물로 연명한 상태였지만 전혀 절망하는 기색이 없다. 간수가 갑작스럽게 일어나 경례를 붙이고, 드레스를 입은 예린이 철망 앞에 섰을 때도. 침착한 태도는 고고하게 유지되었다.

  "오랜만이야. 부관. 아, 이젠 부관이 아니지? 그동안 이름도 몰랐네. 이름이 뭐야?"

  "연경. L. 킬슈테인 입니다."

  "오호.. 연경..이라.. 쉽게 말할 게. 지금껏 연경 네가 보좌해온 녀석이 널 사형시켜야 한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어. 내 가정교사 제안도 거부하고 충성을 다했는데.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저는 정당하게 시행된 일대일 대결을 어지럽혔습니다. 아가씨야 말로 굳이 그런 사실을 통고하러 오신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무슨 일이시죠?"

  "햐.. 아무튼 겁도 없어. 내 신경을 거슬렀다간 제발 죽여달라고 빌게 될지도 모를 텐데."

  "그날 화살을 매긴 순간부터 두려움은 버렸습니다."

  "너 진짜로 윤회를 사랑하고 있구나?"

  지금껏 부관이라 불려 온 자기 자신을 부정하듯, 윤회의 이름을 듣자 연경의 얼굴이 미세하게나마 상기되었다. 예린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혹시나 하고 떠본 건데 그렇게 벌렁 까버리면 내가 다 민망하잖아."

  "... 지금 제가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남겨진 부모님에 대한 걱정보다. 윤회를 바라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좋아, 결정. 넌 오늘 부로 불명예제대다. 그리고 내 개인 가정교사가 되는 거야. 월급도 부관 노릇할 때보다 많을 거고 휴가도 있을 거야. 네가 그렇게도 원하는 윤회를 만날 기회도 있겠지."

  뜻밖의 파격적인 제안. 그동안의 접촉으로 예린의 성격을 알고 있는 연경은 단순히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이 순간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 "꺼내."예린의 한 마디 명령에 무저갱 같았던 쇠창살이 비명을 지르며 내장을 드러낸다.

  "시녀들을 붙여주지. 개인 숙소도 마련해 놨어. 이틀 뒤부터 내 가정교사로 쓸 테니 준비해 둬."

  ".. 알겠습니다."

 

  일주일 전. 전략실의 분위기는 과히 밝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주를 비롯한 간부들에게 결산을 보고하는 호란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두려움이 깔린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를 순간순간 내비치곤 했다. 그 두려움의 고삐를 낚아채듯, 팔짱을 낀 채 보고를 듣던 간부 한 명이 언성을 높였다.

  "이번 프티 불 침략전에 참가한 건 누가 봐도 오판이었어.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한 거지. 서기관?"

  "그 말이 맞아.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전까지 군 상태는 아주 양호했지. 하지만 프티 불 침략전 때문에. 우리 군은 깃발을 거꾸로 매달아야 했지.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온 건 근래 들어 처음이야."

  "뭔가 말 좀 해봐. 서기관. 자네의 무모한 결정의 이유가 뭐였는지를."

  잇달아 서랍이 열리듯 계속해서 제기되는 불만과 해명 요구. 호란은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귀환하기까지 3일 동안 끝없이 생각한 대로 자신을 변호한다. 높은 사기를 가진 아군의 대한 신뢰. 큰 이익을 얻기 위한 대담한 모험의 필요성. 그 밖의 귀로 듣기에 감겨드는 사유를 유려한 화술로 이어나갔다. 테이블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훈련사 수연. 다른 간부들의 불만을 정리하려는 듯 조용히 호란의 설명을 경청한다. 변론이 끝났을 때, 평소 술을 들이켜는 것처럼 거침없이 판단을 내린다.

  "결국 네놈의 판단 미숙으로 백명도 넘는 병사들이 죽었다는 얘기잖아."

  스스로 당장의 위기를 넘겼다고 판단했던 호란의 얼굴에 두려움의 장막이 드리워진다. 모든 변명을 꿰뚫는 수연의 차가운 목소리. 변론을 씁쓸하게 듣고 있던 다른 간부들이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한다. 모두의 공격이 호란에게 쏟아져 내리려 하는 순간.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의외의 인물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네. 호란은 내게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야. 의견을 받아들인 것. 병사들을 용병한 것. 모두 나의 결정이었어. 영주는 나야. 불만이나 의견은 나에게 말해 주게."

  지극히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겠군."영주가 입을 열자 수연은 대놓고 불만을 내뱉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간부들 역시 형식적인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영주가 호란을 감싸주기로 마음먹은 것을 알자 하나 둘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영주와 호란만이 남게 되자 호란은 영주의 발 밑에 엎드렸다. 눈물까지 뚝뚝 떨구며 주섬주섬 잔뜩 잠긴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영주님. 그릇된 판단을 영주님께 제시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고, 간부들로 하여금 영주님께 반감을 드러내게 한 죄. 모두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명예가 실추된 이상 살아 무엇하겠습니까.

  "일전에 해와 구름의 우화를 얘기한 적이 있지. 자네는 구름의 바람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데 성공한 것 같군.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천운에 달려있고,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자네는 앞으로도 서기관 임무를 수행해야 해. 그것이 구원이 될지. 또 다른 악재를 불러올지는 자네 하기 나름이야."

  영주가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호란은 눈치껏 엎드려 있다가 영주의 반응이 없자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달려가 부관인 연경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가둔 것이었다. 예린의 명령으로 연경이 사면되었음을 듣고서는 혼자 손톱을 물어뜯는다. 아무리 자기 위안을 해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을 저지른 만큼. 호란은 자존심에 새겨진 생채기를 홀로 핥으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윤회가 의식을 되찾은 그날. 조개껍데기와 진주로 장식된 마차 한대가 성으로 찾아왔다. 영주와 예린이 함께 마중을 나갈 만큼 귀한 손님. 영주의 조카이자 예린의 친척 동생인 세린이었다. 침착한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조용하고 온화한 17세의 소녀. 예린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영주의 뺨에 입을 맞추는 행위에 일체의 가식도 보이지 않는다. 예린은 세린의 손을 잡고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함께 온 세린의 어머니와 영주는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야? 이모까지 같이 오신 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어?"

  "숙부님께 이야기 못 들었어? 결혼을 주선해 주셨어."

  "뭐..? 결혼..? 너랑 어울릴 남자가 우리 영지에 있었나..?"

  "예린아. 잠깐 물러나 있거라. 세린과 할 말이 있으니까."

  영주의 지시에 예린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세린의 목에 매달리듯 꼭 끌어안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젓는다.

  "싫어요. 안 갈래요. 세린의 남편이 될 사람이 누군지 저도 알아야겠으니까. 아버지도 너무 하세요. 저한텐 아무 기별도 안 하시고."

  "저는 괜찮아요. 숙부님."

  영주는 곤란한 기색을 보였지만 세린의 조용한 목소리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젠 무산될 테니 상관없겠지. 윤회. Z. 아르키메데와의 결혼을 주선했었단다."

  예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입술 끝이 가늘게 떨리는가 싶었지만 곧 활발한 모습을 되찾는다. 다만 방금 전처럼 마냥 유쾌한 분위기는 한풀 접혀 있었다. 세린은 의아한 듯 질문했다.

  "무산된다고요..? 숙부님이 직접 주선해주셨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세린아. 이번 겨울 동안 이곳에서 휴가를 보낸다고 생각하자꾸나. 결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으니까."

  "어머니.."

  "그래. 나랑 같이 신나게 놀자. 공부도 같이 하고. 재미있는 가정교사도 있어.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 같은 건 잊어버려."

  "예린 언니.. 언니까지.. 혹시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언니는 전투에 참가했잖아. 아는 게 있으면 가르쳐 줘."

  세린을 둘러싼 세 사람 사이로 난감한 기류가 흐른다. 때마침 찾아온 지호가 영주에게 경례를 붙이고. 조용하게 보고했다.

  "환담을 나누시는데 실례하겠습니다. 영주님. 윤회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지금 가족과 함께 있습니다."

  "... 알았네. 지금은 일단 물러나게."영주가 눈치껏 지호를 보내려던 차, 세린은 지호의 앞을 막아서며 질문했다.

  "저.. 병사님. 방금 윤회라고 하셨죠.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지호는 어서 물러나라는 예린의 손짓에 가볍게 목례하고 자리를 피했다. 예린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 괜히 궁금하게 하지 말고 한번 보여주는 편이 낫겠어요. 세린도 고집이 있잖아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일단 언약까지 한 사이였으니. 다 함께 한번 가보자."

  의료실로 향하는 네 사람. "저기. 여자애를 안고 있는 남자. 저 사람이 윤회야."예린은 먼발치에서 세린에게 일러 주었다. 오른팔이 없는 것을 처음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편지 몇 줄 읽은 게 윤회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지만. 오랜 친구를 바라보듯 세린의 눈빛에 정감이 흐르고 있었다. 여동생과 어머니. 이모와 함께 있는 윤회에게 전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짙게 배인 슬픔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어떤 애수를 더해주는 가운데, 식구들을 안심시키고자 짓는 억지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조각 연민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저렇게 잘 생기고 늠름한 청년이.. 불쌍하기도 하지."세린의 어머니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예린은 줄곧 윤회만을 바라보는 세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알았지? 어서 가자. 윤회 본인도 결혼이 무산되었다고 알고 있을 거야."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아주 착해 보이는 얼굴이야."

  "억지로 웃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야."

  "아니야. 숙부님께서 보내신 편지 대로야. 순수한 사람 같아. 전사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저.. 숙부님." 

  "그래, 왜 그러니?"

  "오늘은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니 그만 갈게요. 하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부탁드려요."

  "어머, 세린아. 그게 무슨 말이니?"세린의 어머니가 놀라서 세린의 팔을 잡았다. 어린 딸이 동정심을 느낀 것일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실 어머니로선 평민 출신과의 혼사가 못마땅했고 상대가 마땅치 않으면 거절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비록 불쌍해 보이지만 한쪽 팔이 잘린 윤회는 이미 눈 밖에 난 상태였다. 혹여 딸이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헛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눈치. 세린은 어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혼사에 관한 모든 건 어머니 뜻에 따르기로 약속했잖아요."

  순종적인 태도였다. 곱고 예쁘게 묶인 옅은 색의 리본처럼.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고집을 부리지 않는 마음가짐. 예린은 얌전한 세린의 태도에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빨리 가요. 아버지."공연히 영주의 손목을 잡아 끄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세린은 작은 삼촌인 수연에게 식사를 함께 해 주길 부탁했다. 덕분에 수연은 오후 내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세련된 제복 차림으로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많이 컸구나. 세린. 아주 예쁘게 자랐는걸."

  "고마워요. 삼촌. 삼촌도 정말 멋있으세요. 혼자 나이 드시기엔 너무 아까운데.. 좋은 소식은 아직 없나요..?"

  "맞아요. 삼촌. 언제까지 일에만 매달리실 순 없잖아요. 이러다가 저와 세린이 먼저 결혼하겠어요."

  예린은 얌전히 고기를 썰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평소엔 반말로 지껄이면서. 세린 앞이라고 아주 놀고 있군.' 수연은 곤란하다는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세린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식사 시간의 대화를 이끌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친밀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예린은 평소의 제멋대로인 모습을 완전히 숨긴 채 예의 바르고 기품 있는 태도를 보였다. 불편하기보단 오히려 신선한 즐거움을 느끼는 듯하다. 우아한 악기 연주가 부드러운 분위기에 얹어졌다. 음악과 예술이 화제로 떠오르고 귀족 집안다운 고상한 대화가 꽃으로 피어난다.

  잘 시간이 되자 세린은 예린의 방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방을 가득 채운 꽃들을 보고 와아, 감탄하는 세린. 나란히 앉아 시녀들에게 머리 빗질을 맡기고, 꽃을 주제로 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사촌 자매. 삼십 분 정도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잠자리에 든다.

  "언니. 뭐 좀 물어봐도 될까?"

  "뭐든지."

  "전사로 산다는 건.. 어떤 거야?"

  "음.. 사람이 아니라, 칼 한 자루처럼 도구로 취급받는다고 생각하면 돼."

  "언니도 그래? 영주님의 딸이잖아."

  "지휘하는 입장은.. 생각보다 신경 쓸 게 많아. 결과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고."

  "난 언니가 부러워. 내가 해온 거라곤 신부수업 밖에 없으니까. 언니는 후계자가 될 몸이잖아."

  "그렇지도 않아. 너한테만 하는 얘긴데.. 난 마음에 드는 게 없거든. 약혼자가 있지만 꼴도 보기 싫고. 검술 연습이랑 공부가 조금 재미있는 정도. 난 인생이 지루해."

  "음.. 우리 다른 얘기 하자."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옅은 농도의 어둠에 덮인 채 예린과 세린은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먼저 잠이 든 건 세린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 평온한 얼굴. 예린은 낮에 윤회에게 보인 세린의 관심을 떠올렸다. 윤회와 그 가족들의 슬픔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듯 오직 세린의 몇 마디 말만 되새긴다.

  '아주 착해 보이는 얼굴이야. 순수한 사람 같아.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요.'

  어느새 예린은 머리맡 거울대에 있는 손수건을 집었다. 얼굴에 대어보는가 싶었지만 이내 세린의 잠든 얼굴에 살짝 얹어본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쓸쓸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짓는 예린.

  "너라면 괜찮아.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천조각에 수분이 스며들 듯,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순응하는 것만 같은 나직한 목소리였다. 예린은 한참 동안이나 손수건이 얹어진 세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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