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kimleecalli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kim.lee.calli/?hl=ko
모든 것이 예상보다 빨리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중절모에 진회색 슈트를 입은 중년의 신사가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어머! 교수님! 난 또 누구시라고..." 숙현은 반색을 하며 손님을 자리로 안내한다.
"혼자 오셨어요?"
"예! 이쪽에 집 지을 땅 좀 하나 보고 가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예. 여기 살기 좋죠 복잡하지 않고 공기 좋고... 사모님은 여전하시죠?"
미주가 내려다 준 커피를 마시며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무르익어갔다.
"신 교수 소식은 못 들으셨죠?" 숙현의 얼굴에서 차츰 미소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환하게 웃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죠. 알콩달콩 둘이 얼마나 ... 교수님..."
"예, 맞습니다. 벌을 받은 거지요."
'덩그렁! 텅~'둔탁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로 떨어진 커피잔이 정확히 두 동강 난 채 카펫 위로 굴렀다. 미주는 얼른 물 한 잔과 주방 수건을 들고 달려와 탁자와 숙현의 옷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며 떨고 있는 숙현 앞에 물컵을 내려놓았다. 물컵을 쥔 숙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일어서는 미주를 숙현이 잡으며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한 달 정도 됐답니다."
"사고...인가요? 교수님?"
"예. 빗길에서 차가 굴렀답니다."
"죽었나요. 교수님? 죽었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요. 장 교수님?"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미주의 손을 꼭 잡은 숙현의 손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차 한 모금에 목을 축인 장 교수가 입을 뗐다.
"제수씨. 신 교수가..."
"장 교수님! 죄송해요. 제가 지금 현기증으로... 좀 쉬어야겠어요." 숙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풀썩 주저앉는다.
"언니!"
"아니, 괜찮아. 미주야. 장 교수님 좀..."
"알았어. 언니."
숙현은 장 교수에게 목례를 하고 주방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장 교수와 민주만의 무겁고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장 교수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침묵을 깼다.
"지혜 어머니가 지금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사실 이게 아닌데..."
"네. 언니가 지금 많이 놀랐어요. 겨우 안정되어가고 있는 중인데..."
"신 교수 살아있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교수님!"
"예, 불행 중 다행으로 위중한 고비는 넘긴 것 같긴 한데......"
"아~"
"이번 주말에 친구들끼리 갔다 오려구요. 제수씨도 지혜랑 한번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서요."
"혼자 가는 것보다 이번에 같이 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아, 네!"
"기회 봐서 말씀 좀 건네주십시오. 이거 얘기가 어떻게 이리돼서는... 이것 참..."
"알겠습니다. 교수님! 제가 잘 말씀 드릴게요. 근데 생명엔 지장 없으신 거죠?"
"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답니다."
미주는 장 교수를 배웅하고 숙현이 쉬고 있는 주방으로 들어왔다. 주방 한쪽에 놓여있는 흔들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는 숙현이 보인다. 창가에 앉은 한 무리의 여자 손님들 웃음소리가 무거운 카페의 공기를 가른다.
장 교수 일행이 태국으로 신 교수를 만나러 가기로 한날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미주는 조심스레 갔다 오길 권했지만, 숙현은 끝내 냉랭했다.
"내가 살아야겠구나 하고 정신 차린 날, 그 사람은 죽었어. 지혜가 가는 건 말리지 않아. 잘났든 못났든 제 아빠니까." 워낙 완강했기에 미주도 더는 권할 수 없었다.
토요일 오후 주말이라 평소보다 일찍 카페 문을 연 미주.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숙현이 나타나질 않는다. '또 몸이 안 좋은가?' 미주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 미주야! 한 삼사일 고생해라.
청소하느라 카톡이 오는 소리를 놓쳤나 보다. 미주는 전화를 걸었다.
"어! 미주야. 나 곧 탑승해."
"아! 알았어. 언니, 잘 다녀와요."
숙현은 신 교수의 사고 소식을 듣고 그가 살아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그에게 가 있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혼자는 자신이 없었던 그녀는 모든 수속을 다 마쳐놓고 장 교수 일행의 출국일만 애타게 기다렸던 것.
비행기 좌석이 달랐던 장 교수와 숙현은 태국 공항에 내려서야 함께했다. 택시를 탄 숙현의 일행은 한참을 달려 신 교수가 입원해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이미 영실과 연락이 닿은 장 교수의 안내로 병실로 올라가는 숙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연신 엄마의 등을 쓸어내리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지혜의 손을 숙현은 꼬옥 잡아주었다. 마주 잡은 손길로 괜찮다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있었다. 907호 앞에 장 교수가 멈춰 섰다. 숙현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창문 쪽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는다. 장 교수가 다가왔다.
"제수씨! 우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혜야! 잠시 후에 엄마랑 들어오거라." 긴장하는 엄마를 위해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오던 지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 교수 일행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병실 안 한쪽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는 신 교수가 살짝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장 교수 일행과 신 교수를 간호하던 영실까지 다 나가고 숙현 혼자 남아 잠든 남편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으려는 영실을 장 교수와 김 교수가 식사하자며 반강제로 데리고 나갔다. 숙현이 장 교수에게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 환자로 누워있는 신 교수의 얼굴은 고통이 없는 듯 평안해 보였다. 순간 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두 사람의 인연은 국민학교라 불리던 지금의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동네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부모님들 영향으로 둘은 단짝 친구가 되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사춘기 시절에는 서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내외를 하였지만, K대에 나란히 합격하고는 다시 우정을 이어갔다. 바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방학을 이용해 의료봉사 활동을 함께하면서 젊은 시절을 알차게 보냈었다.
미동도 없이 잠만 자는 신 교수를 바라보며 숙현은 연민의 눈물을 쏟아냈다. 잠시 눈물을 훔치며 돌아본 병실 한쪽에 작은 노트북이 눈에 들어온다. 숙현은 끌리듯 그쪽으로 다가가 노트북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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